해가 지는 밤 해가 지는 밤 해를 삼킨 검은 바다는 달과 별에게 속삭이듯 얘길한다 차가운 물 속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개껍데기, 푸른 산호초, 낡은 나룻배 쟤들끼리 두려움에 떨며 낮게 소곤거린다 해가 지는 밤 해를 삼킨 검은 바다는 달과 별을 깊게 바라본다 시 2023.09.24
든든한 술 술에 취해 독백한다 술을 최고로 듬직한 친구 사람은 듬직한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편하게 속마음을 말해버리지 술아, 너처럼 듬직한 사람이 되고 싶구나 시 2023.09.18
우주 드넓은 우주에 이 한 몸을 실어 몸에 힘은 빠지고 공간은 나를 부유한다 이 몸은 공간은 나를 떠오르게 한다 검으면서 하얀 우주는 어디로 우릴 인도하는가 몽환적인 기분이 들어 술취한 것처럼 편하구나 시 2023.09.18
화장지 화장지는 하얗게 하얗게 움직여 어쩜 저렇게 새하얗게 움직이지 책상 위에서 춤을 추는 하얀 화장지 어쩜 저렇게 새하얗게 움직이지 보드랍고 따뜻하고 푹신푹신한 화장지 어쩜 저렇게 새하얗게 움직이지 시 2023.09.18
2023년 9월 18일 8시 26분 쿡쿡모텔에서 신원미상자 발견 툭 툭 뱉었다 더럽고 비열한 증오로 가득찬 말들 그 사람, 그 사람은 세상에 온갖 고통과 증오를 받아도 모자랄 것이다 나는그사람이너무나증오스럽고밉고화가난다어떻게내게그렇게대할수가있지너무나화가난다 2023년 9월 18일 8시 26분 쿡쿡모텔에서 신원미상자 발견 시 2023.09.18
뿌리 뿌리가 내 몸을 휘감는다 손은 움직일 수 없고 다리는 굽힐 수 조차 없다 이게 무슨 일일까 저번 달에 저질은 악행때문일까 업보가 되돌아 온 걸까 맑은 기운을 하얗게 내쉬고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숨을 뱉었다 하늘이 내게 벌을 준 것이 아니길 시 2023.09.18
동화시대 아직은 요정이 살던 동화시대 한 요정이 잎사귀 위에 앉아 새벽 이슬을 마시며 달노래를 부른다 달아, 나를 내려봐주어 별아, 나를 지켜봐주어 땅아, 나를 일으켜주어 맑고, 밝고, 따뜻하던 흙의 숲은 탁하고, 어둡고,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로 변했다 요정이 살던 동화시대는 끝났다 시 2023.09.18
만년 전에 죽은 신 사람들은 모르지만 신은 오래 전에 죽었다 백열등처럼 환하게 빛나는 현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니체가 죽인 건 신이 아니었고 신의 시체였을 따름이다 신은 죽었다 이미 만년전에 죽었다 예수가 고행을 마치기 전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 자라투스트라가 불을 삼키기 전 오시리스가 환생하기 전 이미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그 거대한 몸집으로 세상을 오만의 눈으로 내려다보던 신은 그 무시무시한 신은 이미 오래전 죽었다 시 2023.09.18